1930년대초,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그 활동이 침체되어 가던 임시정부는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여, 무력 우위를 확보한 쪽빠리들의 공격에 대해
그동안의 수세적 자세에서 탈피, 맞짱을 뜨는 전략으로 선회한다.
그러던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장절’ 축하 기념식이 거행된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한인 애국단에서 파견된 의사 윤봉길은
단상으로 도시락 폭탄을 날려 많은 일본군 장성과 고관을 찍소리도 못하게 날려 버렸고,
이어 우리의 아름다운 청년 윤봉길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야말로 참으로 장한 의거가 아닐 수 없다.
폭탄을 날린 순간은 쪽바리들의 국가인 <니미가요> 제창에 이어
니미가요 행진곡이 연주되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이 또한 더욱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는지 이 당시 피해를 본 쪽바리들의 상황을 알아보자.
- 시가라와 요시노리(상해 파견 군사령관)
폭탄 파편에 온몸이 만신창이 됨. 한달후 뒈짐.
한달이나 버티고도 신장 이식 등 장기기증 안함.
- 가와바타 데이지 (상해 거류민단장)
약 열흘간 버티디 뒈짐. 역시 장기기증 없음.
- 노무라 기치사부로우 (제3함대 사령관. 중장)
왼쪽 눈 날라가 애꾸됨.
- 우에다 겐요시 (제9사단장, 중장)
윤봉길 의사의 절묘한 컨트롤에 왼쪽 발가락 다섯개만 날라감.
- 시게미쯔 마모루 (상해 일본 주재 공사)
오른쪽 다리 3분의 1을 까마귀 밥으로 선물.
그 이유로 훗날인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시 지팡이 짚고 나타남.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단지 문헌에 근거한 내용으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
그 쾌거의 현장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심층연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를 하던중
새로운 사실을 몇가지 알게 되었다.
1. 우선 폭탄을 알아보자
폭탄은 클수록 폭발력이 커진다.
물론 지금은 핵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폭탄이 있지만 1930년대 초반에는 기술로 보나
또는 독립군의 군자금 상황으로 보나 작아도 큰 폭발력을 가진 고효율 폭탄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늬만 도시락 폭탄이지
실제 중량이 10Kg에 가까운 무거운 물체였으며
또한 폭발력은 지금의 수류탄 정도였음이 분명하다.
2. 어떤 거리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는가?
그런 폭탄으로 쪽바리들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윤봉길 의사는 멀쩡한 것으로 보아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폭탄의 위력을 감안하여 살상반경을 최소한 20미터로 보아도 죽은 쪽바리 놈은
폭탄이 떨어진 곳으로부터 반경 20미터 이내에 있었다는 얘기고
윤봉길 의사는 자신은 피해가 없는 걸로 보아
최소한 30미터 이상을 던졌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더욱이 단상 위에서 폭발했다면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포물선을 그리는 과정에서
폭발된 것이니 실제 비거리는 훨씬 더 멀었다는 얘기가 된다.
3. 그렇다면 어떻게 10Kg짜리 폭탄을 30미터 이상 던졌는가?
바로 이 문제가 나를 가장 괴롭힌 부분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실험에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사용하는 매킨토시 컴퓨터의 <외장 하드 드라이브>가 있다.
이것을 우리끼리의 별칭으로 ‘도시락’이라고도 하는데
크기가 고3 도시락과 비슷하거나 조금 크고 무게는 제법 묵직하여
한 손으로 들고 소변 보려면 들고 있는 손이 달달 떨린다.
소변 때문에 떨리는 게 아니다. 무거워서 떨린다.
그 하드 드라이브로 실제로 던지기를 해보니 10미터 남짓 날아간다. 하나에 20만원짜리다.
가장 힘이 좋은 사람도 감히 40미터를 던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따라서 그 던지기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4. 이런 방법으로 던졌다!
우선 도시락이었으니 보자기에 싸여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보자기 끝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다 던지는, 올림픽 종목에도 있는 ‘투해머’방식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돌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쉽게 발각될 수가 있으며
또한 비거리는 늘어나지만 적중률이 엄청나게 떨어진다.
최소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는 되어야 원하는 지점으로 던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시락을 접시 잡듯이 잡고 몸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던지는,
이른바 ‘투원반’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까의 경우와 같이
시간이 지체되는 문제가 있으며 특히 행동 반경이 많이 필요하므로
좁은 공원의 밀집도로 보아 불가능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결론은 윤봉길 의사가 던진 방식은 야구 선수의 투구 자세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와인드업 상태가 아니라 주자가 누상에 있을 때 도루를 견제하며 던지는 방법인
셋포지션에서 폭탄을 던졌다는 것이다.
* * *
이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어 한국 독립 운동의 의기를 드높였으며,
특히 한국의 독립 운동에 냉담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중국의 장 제스는 중국의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감탄하였으며, 이후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우리 입맛에 맞는 자장면 개발에 본격적으로 앞장서게 된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정부가 중국 영토 내에서 우리 민족의 무장 독립 활동을
승인함으로서 한국 광복군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는 또 한번의 슬픔이 밀려왔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 이후 8개월 후인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작업장 한쪽 구석에서 총살되었을 때 나이가 24년 6개월이었으니
어쩌다 이분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청춘을 이렇게 바치게 되었는가?
아마도 지금 태어났으면 또 하나의 메이저리거가 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개인적으로도 부와 명성을 얻으며 행복하게 살았을텐데 말이다.
* * *
이제 본격적으로 일본 문화가 개방된다.
벌써부터 인터넷에는 일본 연예인의 팬클럽이 공식으로 출범했다.
그들의 문화가 나쁘다거나 또는 개방정책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수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수용하고 있는지 우려가 될 뿐이다.
바로 이 시대-
우리는 일본의 문화적 침투에 어떤 폭탄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하누가
진짜 오래전에 쓴 글이다. 20년도 훨씬 넘었겠다!
그때는 글을 이렇게 썼나보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