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명쾌한 답변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아하누가 2024. 6. 18. 23:47


그날은 아침부터 시작이 좋지 않았어.

집을 나서는데 말이야 집 앞 골목길로 커다란 화물차 한대가
꾸역꾸역 들어 오더라구.
골목 중간쯤에 서 있던 나는 그 크기에 놀라 한쪽벽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러기에는 그놈의 화물차가 너무 크더라구.
몸을 벽에 바짝 붙이긴 했지만 차는 계속 다가와서 정말
이러다간 깔려 죽는, 아니 ‘낑겨’ 죽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어.

 

 

마침 내가 기대어 서 있던 벽의 구조가 조금 요상하게 생겨서
상체는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는데 땅에 디딘 발은
아무래도 커다란 바퀴에 깔려버릴 것 같은 그런 상태였거든.
화물차가 내 앞을 지나가는 순간 겨우겨우 발을 들어 어딘가에
자리를 잡으려는데 말이야.
발을 디딜만한 곳은 딱 한 곳 뿐이었는데 그곳에 마침
어떤 놈의 작품인지, 아니면 어느 xx 소행인지 한덩어리의
똥이 자리잡고 있는 거 있지.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어쨌냐구? 이런, 그것도 질문이라구 하냐?

거기서는 선택이란 갈등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어.
그냥 눈 딱감고 밟았지 뭐. 거 참 기분 묘하데.
그동안 살면서 많이 밟아보긴 했지만
이렇게 그 실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순수한 나의 의지로
밟아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생각보다 많이 밟히더라구. 미끄러지는 질감은 바나나를 밟은
상태보다는 조금 더 끈적거리면서…
아니, 내가 지금 뭐하는 거야.

하려고 하는 얘기는 이게 아니라구!
하여튼 하루종일 기분이 영~찝찝했어.

 

 


결국 나는 모든 일을 연기한 채 실로 오랫만에 동네 목욕탕을
찾을 수 밖에 없었지.
근데 거기서 바로 문제의 사건이 터지고 만거야.

입구에서 돈 받는 아주머니랑 한바탕 실랑이를 했지.
돈을 분명히 주었는데 또 달라는 거야.

어이가 없더라구.
한참을 옥신각신 하다가 그냥 줘버렸어.
속으로 살이나 더 쪄라!를 여섯번 외치면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목욕탕 값을 반밖에 안주었더구만.
난 아직도 그 가격인 줄 알았지 뭐.

 

 

기분이나 좀 바꿔보려고 옷을 잽싸게 벗고 들어가
뜨거운 것을 참으며 탕속으로 들어갔어.
원래 나는 뜨거운 탕안에 잘 들어가지 않아.

뜨거운 거 매우 싫어하고 또 잘 견디지도 못하는데다가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졸려서 때를 못밀겠더라구.

 

근데 그날은 기분도 그렇고 해서 용감하게 들어갔던거지.
근데 말이야.
막상 탕속으로 들어가니 주변에서 목욕하던 사람들이 모두들
의미심장한 웃음을 입가에 띄운 채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라구.
뭔가 조짐이 심창치 않다는 생각이 막 들려는 무렵,

한 아저씨가 날보고 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거야.

그 사람 많은데서.
얘기인 즉, 몸도 씻지 않고 탕속에 들어가면 어떡하냐는 거지.
그러면서 계속 떠드는 것이야. 목욕 문화에서 시작해서
한국인의 근성이며 미래시대의 예상까지.
참 쪽팔리기도 하고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나더군.
그 사람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마땅한 대꾸가 없었어.
그나마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적절한 대답은 아~ 그러시냐구,
죄송하게 됐다구, 그러면서 맘에 없는 웃음을 허허허 웃으며
대범한 척 하는 방법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거야.

하는 수 없이 탕안에서 쑥쓰러운 얼굴로 나와 샤워를 하려니
그것도 기분이 참 더러운 거야.
왜 내가 탕속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그런 얼굴로 쳐다보았는지
알 것 같았어.

도저히 짜증이 나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지.
그냥 나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는 하루였던 셈이지.

 

 

 

* * *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생각난 그날 얘기를
입에 침을 튀어가며 떠들고 있었어.
근데 그 자리에 마침 순발력이 대단한 친구가 하나 있었거든.
그 녀석이 날보고 그러는 거야. 왜 그럴 때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냐며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말을 듣는 순간 난 그만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그렇게 명쾌한 대답이 있다니......
그런데 그 녀석 말을 듣고 나니까 그 때의 일이 더 열받는 거
있지. 왜 그때 그 대답을 못했던가. 아, 나는 바보야
바보라구…….하면서.

 

 


역시 명쾌한 답변은 타이밍이 중요한 거야.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뭐하나…….
하지만 난 거기서 멈출 수 없었어.
의도적으로라도 좋은 타이밍을 만들어서라도 꼭
그 명쾌한 답변을 하고 말거라는 복수심 가득한 결심을 한거지.

그래서 그날 이후 난 시간만 나면 목욕탕을 찾았어.
그리고는 남들 보란듯이 목욕탕을 들어가 주저없이 탕속에
풍덩풍덩 요란한 소릴 내며 용감하게 뛰어들곤 했던 거야.
뜨거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지. 근데 말이야…
참 이상하더라구.

그런 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아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거야. 무슨 얘기냐구? 이런, 답답하긴.

그러니까 아무도 내게 왜 몸을 씻지도 않고 탕안에 들어가느냐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말이야. 그러니 또 열받더라구.

그래도 난 열심히 목욕탕에 출근했어. 출근만 한 정도가 아니야.
탕속에서 나와서 옷을 입은 다음 다시 옷을 벗기 시작해서
지금 막 들어온 사람처럼 위장까지 한 채 또 다시 탕속으로
뛰어들곤 했어. 몇번을, 몇십번을 뛰어들어도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구. 약오르는게 지나쳐
슬퍼지기 시작했어. 탕속에 들어가 있으려니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더군. 한마디로 왜 사냐 싶었던 거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어.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한 녀석이 문을 열자 마자
탕으로 쪼로록 달려와 풍덩 들어오는거야. 기가 막히더라구.
안 그래도 신경이 바짝 날카로와져 있던 나는 대뜸 그 녀석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지.

 

 

“ 야 이 녀석아! 몸도 씻지 않고 바로 뛰어 들면 어떻게!”

 

 

잘 걸렸다 싶었어. 이 녀석에게나 큰 소리라도 쳐야
성질이 좀 풀릴 것 같았거든.
그래서 다짜고짜 떠들어 대기 시작했어. 목욕 문화에서부터
조국의 앞날까지…….
하~ 그런데 말이야. 이 녀석이 뭐라는지 알아?
나 참, 나 완전히 돌아버릴 뻔 했어. 나한테 이러는 거 있지.

 

 

“아니, 요즘도 매일 샤워 안하는 사람이 있나?”

 

 

내가 왜 그말을 듣고 돌아버릴 뻔 했냐구?
바로 그 말이었어.
그 사건 이후에 내가 늘 마음 속의 비수처럼 품고 다니던
바로 그 답변, 바로 그 말대꾸를 그 녀석은 한방에 해버린 거야.
난 미칠 것만 같았어.
며칠을 떼굴떼굴 굴러도 분이 안풀릴만한 엄청난 재난을
만난거지. 난 그말에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어.
아니, 대꾸할 정신도 없었던 거야.
그저 속으로 욕만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어.

 

 

 

* * *

 

 

 

목욕탕 바깥의 하늘은 참 맑았어.
터벅터벅 길을 걸으면서 난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
명쾌한 답변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 말이야.
그리고 그 순발력이 뛰어난 친구에게는 오늘의 이 사건은
말을 않기로 했어. 아마 그 친구는 그때의 상황에 적당한 답변을
또 내게 말해줄테고 그러면 난 또 한번 돌아버려야 할테니까 말야.

오늘은 이만 할래.
재밌는 일 생각나면 또 얘기해 줄께.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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