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비밀번호라는 것이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되었다.
말 그대로 상당히 비밀스러워야 하는 동시에
무언가 말못할 내용들이 잔뜩 숨겨 있어
섣불리 꺼내기도 힘들 것만 같은 이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된데는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밀번호를 사용하는 곳도 하도 많아져서
이건 도무지 비밀번호가 무엇이었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하는 일이 잦아졌고 급기야 해당 업소에 찾아가
자신의 비밀번호를 확인해야 하는,
실로 웃지 못할 일들도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은근히 얼빠진 사람이나
기억력이 몹시 좋지 않은 사람으로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 겪어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아주 오래전에 어느 은행에서 예금통장을 만들려니
비밀번호를 적으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비밀번호가 세자리여서 손쉽게 기억할 수 있는
집 전화번호의 국번을 적은 적이 있었는데
얼마뒤 다른 은행에 통장을 만들 때에는
이미 비밀번호가 네자리수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집 전화번호를 비밀번호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먼저 쓰던 비밀번호도 네자리수로 바뀌면서 맨 앞자리에 ‘0’이 하나씩 붙어
원래 의도와는 다른 비밀번호가 되어 버렸다.
결국 두개의 비밀번호가 생긴 셈인데
처음으로 비밀번호가 2가지로 나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생겨나는 비밀번호에는
비교적 스스로의 룰을 지켜가며 통일을 유지했지만
그 당시의 생각으로는 비밀번호가 이렇게 많아지리라는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을뿐더러
세상의 비밀번호에 대한 개념 또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래야 알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가 여러가지가 되는 배경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같은 비밀번호를 계속 쓰다보니
남들이 보기에 무척 단순한 놈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는,
혼자만의 멍청하기 그지 없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고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밀 번호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나면
마치 다른 모든 것들의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 같아
차츰 차츰 여러가지를 사용하다 보니 몇가지의 비밀번호가 더 추가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경우는 4자리 숫자를 넘어
6자리의 비밀번호를 사용해야 하는 곳도 있었고
또한 그중에는 숫자뿐 아니라
알파벳이 반드시 하나 들어가야 하는 비밀번호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여러가지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게 되니
사용하는 비밀번호의 종류가 갈수록 늘어났다.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학번, 군번
심지어 빤스와 런닝셔츠 치수를 집어넣어도
계속 더 많은 숫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비밀번호가 가지는 고유의 특성으로 볼 때
어디엔가 비밀번호만 가지런히 적어두는 것도 또한 바보짓 아닌가?
* * *
가만히 눈을 감고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비밀번호를 모두 정리해보았다.
우선 거래하는 은행 예금통장이 안쓰는 것까지 모두 7개.
하나 빼고는 다 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증권회사가 3군데인데 계좌번호와 관련된 비밀번호가 따로 있고
사이버 거래를 위해 아이디와 함께 사용하는
비밀번호가 따로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도합 6개의 비밀번호가 나온다.
물론 이 비밀번호중에는 같은 번호도 있지만 자릿수가 달라
불가피하게 다른 비밀번호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가 모두 6개. 각각의 비밀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핸드폰을 켜면 잠금장치가 설정되어 있다는 표시가 나타난다.
아들 녀석이 장난하는 것을 막고자 설정해 둔 것인데 일단 그것을 풀어야
전화를 걸 수 있다.
또한 음성 메시지가 도착하면 이것을 들어야 하는데 이 또한
다른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같은 번호로 지정할 수도 있지만 워낙 매카니즘에 둔한 나로는
지금 번호를 외우는게 더 편하다는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핸드폰뿐 아니라 전화를 통한 음성정보를 제공하는 회사에 전화를 하면
자신의 회원번호를 눌러야 하고
또한 그와 연관된 비밀번호도 눌러야 하는데
그런 곳도 두어군데 된다.
거기까지도 참을만 한데 PC통신이나 인터넷으로 범위를 넓혀보면
이야말로 까무라칠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가입한 통신사가 2개가 되는데
가끔씩 부득이 비밀번호를 변경해야 하는 일이 생기니 이야말로 큰 일이다.
인터넷의 경우는 이게 더욱 심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이트가
무료일 경우 무조건 가입을 하게 되는데
한군데 가입할 때마다 그에 대한 비밀번호가 생겨난다.
무지막지하게 생겨난다.
심지어 무료로 이메일 계정을 주는 사이트에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사용할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받곤하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물론 80% 이상이 같은 비밀번호를 사용하지만
나머지 다른 20%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이러다가는 정말 비밀번호에 파묻혀
내가 사용해야 하는 문의 열쇠를 미처 열지도 못하고
기절해 버릴 것만 같다.
* * *
뉴스를 보니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비밀번호 대신
지문이나 음성 또는 안구의 조직으로 비밀번호를 대신한다는,
다분히 SF적이고 테크노적인 얘기들이 들린다.
그렇게라도 된다면 그나마 지금의 고민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으니 다행스럽다.
어쩌다 세상이 이다지도 비밀스럽게 자신의 공간을 지켜야 하는 세상으로 변했는지
한탄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한가하게 비밀번호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말도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 앞으로의 세상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비밀스럽게 살다가 비밀스럽게 일을 하고
모든 정보를 비밀번호와 함께 관리하다가 비밀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갑자기 어렸을 때 흘려 듣던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얘기 말이다.
정말 요즘 같은 세상에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도 참으로 행복한 일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문득 그런 친구들이 있는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씩 떠올린다.
그리고 나니 비밀번호에 잔뜩 둘러싸인 답답함에서 조금은 벗어난 기분이 든다.
역시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돈이나 취미가 아니라
이를 함께 할 수 있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인가 보다.
아하누가
세월이 흘러 인식은 변하여, 지문 등의 신분확인은 인권침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비밀번호는 아직도 골칫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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