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 여자 한 분

떨리는 허벅다리

아하누가 2024. 5. 6. 21:17


     아들 후연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핸드폰을 한다.
     처음에는 엄마가 번호를 꾹꾹 눌러줘야 수화기를 들고
     아빠 소리를 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자 엄마가 TV를 보며 불러주는
     숫자를 듣고 스스로 번호를 눌러 내게 전화를 했다. 
     


     전화 내용이야 너무도 단순 명료하며 옆에서 불러주는 엄마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나중에는 그 말들을 이미 외워 내가 뭐라 하든
     혼자서 각본(?)에 쓰여진 대사처럼 줄줄이 말하고 끊곤 했다.     
     그 실력은 날이 갈수록 월등하게 향상되어 정해진 대사말고도
     스스로 응용력을 발휘하여 목소리의 톤을 조절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감정의 표현도 목소리의 강약을 통해 훌륭히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뛰어난 발전 속도를 보이던 녀석은
     결국 혼자서 엄마 도움 없이도 내게 전화를 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요즘은 시도때도 없이 전화기를 눌러 내게 전화를 걸곤 한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대견한지
     목소리에 언제나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              *              *

 

 


     며칠간 후연이가 다니는 놀이방이 방학에 들어갔다.
     선생들도 좀 쉬어야 할 테지.
     오후에 거래처에 들어가 상당히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
     업무에 대한 브리핑을 하는데 허벅다리가 계속 울린다.        
     누군지 전화를 하는 모양이고 진동으로 설정된 채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핸드폰은 주인을 부르며 계속 애꿎은
     허벅다리만 흔들고 있다.
     갑자기 허벅다리에 손이 가자니 브리핑하다 말고
     수절과부가 된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될까봐 손도 대지 못하고
     하던 말에 열중하려 노력했다.
     잠시 브리핑 중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어 살짝 보니
     집 번호가 찍혀있다. 녀석이다.
     울리다 제풀에 멈춘 핸드폰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하던 말을 계속하자니 말이 떨리는지 몸이 떨리는지
     허벅다리로부터 시작된 울림은 에코우가 잔뜩 들어간 
     

     노래방 마이크를 통해 말하는 것처럼 말을 울리게 하고
     가리키는 손짓은 수전증 환자처럼 달달 떨리고 있었다.
    
     녀석은 3번이나 연속해서 전화를 눌렀다.
     더 이상의 울림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꼼지락 거리며
     밧데리를 몸체에서 분리시키는데 성공하자 비로소 잠잠해졌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집에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받으신다. 녀석은 잔다고 한다.
     더우니 낮잠이 올만도 한 시간이겠지.

     


     후연아 미안해.
     아빠가 전화를 받을 수 없었거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네가 나와 얘기를 하고 싶어도
     못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단다.
     아빠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중요하다고 다른 일 제쳐두고
     항상 전화만 할 수는 없는 일이란다.
     그것이 세상살이라는 건데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낮잠은 잘 잤지? 꿈에서 아빠가 맛난 거 사오지 않았던?
    
     들어가면 어제 하던 호랑이 얘기 마저 해줄게.
     아빠는 후연이 전화가 가장 좋단다.
     나중에 커서 너도 핸드폰이 생겼을 때 내 전화를 못 받게 될 때가
     있을 테고 그때가 되면 아빠를 이해할 거야. 그치?

 

 

 

 

 


                     - 2001년 어느 여름날 오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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