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를 다시 시작하려니 만만치 않다.
세월도 지났으니 사회초년생처럼 패기로 부딪힐 수도 없고,
직접 처리해야 하는 업무량은 줄었다 해도 책임져야 할 일은 많아지니
정신적으로 편하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사장만도 못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신입사원만 못하니 중간에 끼인 듯한 직위와 나이가 부담스러운 요즘이다.
하루는 신입사원 면접을 봤다.
면접관이 되어 입사희망자를 면담하는 과정이다.
예전에 직장생활 할 때도 가끔 내 부서와 관련된 일에서의 면접은
담당한 적이 있었지만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더욱이 직장생활 이후 그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의 일이야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관념에 젖었고,
조금 더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달관적 자세로 인생을 지내왔던 터라
상투적 문답이 오가는 면접 자리야말로 흥미롭지 않은 자리였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월급쟁이의 사명이듯
이 흥미롭지 않은 문답을 해야만 했다.
이것도 몇차례 반복해서 하니 녹음기처럼 말도 술술 잘나오고
상대가 뭐라 대답하든 개의치 않고 다음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신선들의 선문답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면접이란 대부분 그런 것이다.
의미가 없는 듯한 반복형 문답에서 생기는 조금의 틈을 찾고
그 찾은 틈에서 상대의 진실과 근무의욕, 나아가 품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 몇마디로 근무의욕과 능력을 판단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불행히도 쉽지 않은 일이다.
* * *
이날도 그런 상투적인 대화가 오가는 면접시간을 맞고 있었다.
면접을 보는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긴장했겠지만
내게는 지난 연륜과 경험이 그런 긴장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간략한 회사 소개, 업무 내용, 근무조건 등 상투적 대화가 끝나고
마지막 남은 가장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혹시 회사 업무나 근무조건 중에 궁금하신 것 있으면 질문하세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회초년생 아가씨는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나름대로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면접시간 동안 보아오지 못한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밥은 주나요?"
"......!"
비단 이 상황이 면접의 자리가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의 다른 대화였다 하더라도
나는 이러한 질문에 상당히 유쾌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 면접은 이렇게 해야 하고 질문은 솔직한 궁금증을 물어야 한다.
세상 사는 일에 밥먹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나.
이런 긴장된 상황을 비집고 이렇듯 절묘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면
무슨 일을 시켜도 잘할 것이다.
내 기준이라면 이 사람은 무조건 합격이고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최고 대우를 해줄 것이다.
"당연히 밥은 줍니다. 또 궁금한 것 있나요?"
웃음이 터져나올 듯한 상황을 간신히 참고 면접관으로서의 품위를 애써 유지한 채
상대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왕이면 자꾸 슬픈 생각을 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수 있는 웃음을 방지하는
순발력있는 방법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면접자가 또 질문했다.
"혹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계속 근무할 수 있는지요?"
".......?"
여자로서 이 부분은 어쩌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이 크나큰 축복이어야 함에도
이 사회는 아직도 임신과 육아에 관한 모든 것이 부담스럽다.
특히 직장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 부분 만큼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축복받아야 할 일이다.
나아가 현재 인구의 감소로 인해 오히려 인구증가보다 더 골치 아파야 하는 것도
이러한 잘못 인식된 사회현상 때문이다.
적어도 나만이라도 혹은 내가 있는 회사만이라도
이러한 사회적 불합리는 고쳐나가야 한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다행히도 이 회사는 그 면에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라
나 역시 대답하기에 자유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목에서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자세를 보인 면접자에게
성의 없는 단답형 대답은 회사의 의지를 알리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이나마 어떤 대답이 상대방의 걱정을 해소하고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을 지 떠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에선 적절한 표현이 떠올랐고
머리보다 가벼운 입은 신중할 틈없이 열렸다.
"결혼은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해도 일은 계속 할 수 있습니다."
"......?"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리라는 나의 앙증맞은 바람에 대해
상대방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이게 다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움 입의 방정 때문이다.
그리고 흐지브지 면접을 끝났고
나는 이 면접을 통해 또 하나의 삶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엔 마무리가 중요하다.
그리고 뻔히 아는 교훈을 안지키는 건 모르는 것 보다 더 나쁘다.
대화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면접도 대화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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