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평화롭던 사무실에 누군가 돌을 던졌다.
얼마전에 일어난 산불 이야기를 하던중 누군가 불쑥 이런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런데 말야. 불이 났을 때 뜨거운 물로 끄는게 더 잘 꺼질까?
아니면 차가운 물로 끄는게 더 잘 꺼질까?"
언뜻 생각하기에 전혀 비과학적이며 비상식적인 한심한 질문일 수 있는 이 주제는
먹고 사는 일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에 병적으로 집요한 집착을 보이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 들여져 복잡하게 얽혀지기 시작했다.
사무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일에 논쟁을 하고 자신의 억지주장을 열변하는 일을
몹시 즐거워하는 변태적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만 만나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논쟁에 참여한다.
주제는 언제나 부질없는 내용이지만 논쟁은 언제나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다.
이러한 주제가 나와서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중도'의 의견을 내는 일이다.
이와 거의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는 것으로 '양시양비'성 의견 제시가 있는데
어떤 논쟁에 있어 저 두 가지 방법으로 의견을 제시한다는 사실은
동료로부터 '왕따'를 당하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왕따 -
이는 우리 사무실 특성에 있어 구조조정보다, 회사의 재정부실로 인한 파산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이것의 멍에를 뒤집어쓰게 되면 차라리 제 발로 회사를 떠나는 것만
못하다는 전설의 형벌이다.
따라서 어느 의견이 나오고 이에 대한 진위를 가리는 설전이 벌어졌을 때는
어느 한쪽 서서 그 말이 틀리던 맞던 일단 우겨야 한다.
따라서 사무실 동료들은 이 주제에 대해 뜨거운 물로 불을 끄는 것이 더 빠르다는 파와
차가운 물로 불을 끄는 것이 더 빠르다는 두 파로 자연스럽게 나뉘었으며,
각 파별로 저마다 자신있는 전문 분야의 용어를 들먹거리며
자신이 지지하는 학파의 학문적 당위성과 실용적인 현실 감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차가운파'의 논리가 제법 먹혀들어 '뜨거운파'는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뜨거운파의 약한 모습은 차가운파의 거두인 공대 출신 동료가 '열역학 제1의 법칙'이라는
생소한 전문 용어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전문 용어라는 것에도 일단 한수 접고 들어가는데 지금 나누고자 하는 중요한 얘기인
불 끄는 문제에 있어 '열역학'이라는, 깊은 관련이 있을 것만 같은 용어가 등장하니
뚜렷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잠시 추춤거리던 '뜨거운파'의 거두, 일명 우기기의 대명사인 한 동료가
뜨거운 물이 불을 끄는데 더 효과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어렸을 때 불장난하고 끌 때 빙 둘러서서 오줌 싸잖아.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이 말을 시발로 뜨거운파는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각자 오줌을 이용해 불을 끈 무용담으로 이어졌고 이를 전문 용어로 상쇄시키려던
차가운파의 논리적 공세에 맞서 오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체적 특정 부위의 명칭을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고 말하며 차가운파의 지적 이미지에 저질 이미지로 대응했다.
그리고 그 결론 없는 논쟁은 하루종일 이어지고 있었다.
* * *
가끔 사무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논쟁을 하는데
그 발상들이 탁월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하다.
아마 매일 좁은 공간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분위기를 달리 해보자는
갸륵한 발상에서 비롯된 일일게다.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도 반론을 하는 사람도 그러한 사실을 다 안다.
그리고 그렇게 보내는 하루가 오히려 더 활기 있다는 사실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적은 일에 흥미를 느끼려 하니 이 시대의 30대 가장들은(차가운파의
거두는 40대다) 참 불쌍하다. 하지만 어쩌랴.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걸.
오랜 논쟁이 결론 없이 각 파의 주장만 외치다 지칠 무렵 TV뉴스에서 비를 맞으며
항공기 참사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하는 화면이 나왔다. TV를 보던 누군가가 말했다.
"근데 비가 올 때 우산이 없으면 뛰어가는 게 비를 덜 맞아?
아니면 걸어가는 게 비를 덜 맞아?"
"......!"
또 다시 긴 논쟁은 시작되고 오늘도 이 시대의 아저씨들은 이렇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은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 아주 소박한 기대를 하면서.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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