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영화, 동시상영, 그리고 비디오

아하누가 2024. 6. 20. 00:22



누구나 한 때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기성세대의 한켠으로 다가서기 전에는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물론 유명한 감독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이나 또는
멋진 영화 주인공이 되어보겠다는,

무리하고도 발칙한 발상은 시작도 한 적이 없었고
다만 무언가 멋있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꽤 오랜 일이다.

 

 

            *          *          *

 

 

군에서 제대하고 얼마되지 않은 무렵, 이른 아침부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보러 가자는 얘기였는데 아침에 가야 500원이라도 싸게 본다는 것이
그 친구의 설명이었다.

그에 대해 나는 ‘백수가 아침 일찍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하루가 무척 길다’는 백수 입장의 의견을 조심스레 펼쳐가며
편안한 시간대의 영화감상을 기대했으나
돈을 쥐고 있는 결정권자는 자신의 강한 의지만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조조할인의 혜택을 받으며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가 끝나자 그 친구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아직 영화가 준 감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리를 훌쩍 떠 버렸다.
살다보니 별놈이 다 있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할 일이 없는 내가 이상하면 이상했지 바쁜 놈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
사회통념이라 딱히 남에게 호소라도 할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갈곳도 오라는 곳도 없어 집에 다시 들어왔더니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또 영화보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아침의 일도 있고 해서 잠이나 자려고 거절하려는데

이 친구는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했다.
집 근처에 2류 영화관에 가면 2편을 이어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냥 단순히 영화를 본다고 생각했으면 안갔을텐데 동시상영이라는
알듯모를 퇴폐성 짙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제안에

그만 집을 나서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도 2편의 영화를 마치고 나니

이 친구도 다른 약속이 있다며 훌쩍 떠나가 버렸다.
하긴 여자도 아닌 남자끼리

컴컴한 극장안에서 궁상맞게 앉아 있을 정도라면
무언가 시간을 때울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어째 그날은 그렇게 하루가 지나는 것만 같았다.

 

 

            *          *          *

 

 

하지만 저녁 식사시간도 안되었을 무렵, 작은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매형이 출장가서 집이 비었다며 집에 와서 자고 가라는 것이었다.
백수에게는 부탁의 90%가 그런 내용이다.
저녁도 먹을 겸 부지런히 출발해서

누나네 도착했더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누나는 비디오나 빌려 보자면 나를 데리고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더니
맘에 드는 걸 고르라고 했다.

영화라던가 또는 ‘동시상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텐데

 ‘비디오’라는 단어가 나오니 이 또한 새롭게 받아들여지면서
무언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잔뜩 들었다.

 


보고 싶은 걸 다 빌리고 싶었지만 누나 가계부도 생각해서 3편만 골랐다.
그러나 집에 와보니 아직 되돌려주지 않은 비디오가 2편이나 더 있었다.
이걸보고 기뻐해야 할지 기겁을 해야할 지 잠시 망설였지만
어차피 내돈 들인게 아니라는 생각에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있기로 했다.

 

그날 늦은 밤, 아니 그 다음날 새벽 5시까지 비디오 5편을 모두 봤다.
잠이 드는 시점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하루에 8편의 영화를 본셈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영화 8편을 보면 어떤 증상이 발생할까?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지루한 과정을 세세히 설명했다.

하루에 영화 8편을 이어서 보면

마지막 영화를 볼 때 즈음 다음과 같은 증상이 발생한다.

 

 

1. 등장인물이 기억속 어딘가에서 뒤섞여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 어라? 그럼 아까 폼잡고 다니던 스티브는 어디 간거지?
- 왜 저 여자가 저놈하고 뽀뽀하고 있지?
- 저런 병신! 너 아까 쓰던 총 있잖아?
- 이런? 주인공이 초반에 죽는 경우도 있나?
- 가만? 내가 화장실은 언제 갔다 왔더라?

 

 

2. 동서양과 과거 현재가 어울어져 모든 영화가 SF 공상과학 영화가 되어
이런 말들이 튀어 나온다.

 

- 참 나... 저 놈은 아깐 칼 쓰더니 이젠 레이저 광선 쏘네
- 타임머신 타고 가서 찾아 오면 되잖아
- 주윤발은 능력도 좋아, 서양 여자도 잘 꼬시네...
- 저런...거짓말도... 옛날 중국에도 서부시대가 있었냐?
- 무림의 고수들도 자동차타고 다니나?

 

 

3. 영화와 현실을 심히 혼돈하여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므로
이런 착각에 빠진다.

 

- 음... 내가 어디에서 여기까지 왔지?
- 그래....내가 킴 베신저랑 이혼하길 잘했어.
-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캡슐머신부터 손봐야겠어
- 내일 줄리아 로버츠 생일이라는데 뭘 사주지?

 

 

4. 영화나 비디오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중추신경과 대뇌가 마비되어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 정말 북한하고 쿠바하고 전쟁을 할까?
- 개그맨 심형래랑 가수 이은하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 여동생이 만약 남자였다면 남동생일까?
- 눈알이 빠진다면 들고 다니면서 보니 더 편할텐데...

 

 

            *          *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다.
보고 보고 또 보고 벌써 10여번은 본 것 같다.

누들스라던가 맥스 또는 베일리 장관,
그리고 데보라 같은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생각나도 어느새 마음이 뛴다.
제일 좋아하는 남자 배우는 당연히 로버트 드 니로와 제임스 우즈고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는 엘리자베스 맥거빈이다.
물론 제일 좋아하는 영화 음악도 이 영화며,

제일 좋아하는 영화 음악가도 당연히 엔니오 모리꼬네다.

아마 이렇게 좋은 영화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하루 8편씩이나 보아가며 강행했던 시절이 있었음이요

또한 그러기에 옥석을 가릴줄 아는 혜안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딱히 바쁜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렇게 미련스러울 정도로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 일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걸 보니 말이다.
그나저나 언제 또 나는 그런 열정으로
하루에 영화든 비디오든 8편을 한번에 볼 수 있는 날이 다시 올까?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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